모택동이 숙청한 측근들 (팽덕회, 유소기, 임표)
아래에 모택동이 숙청한 '공산 혁명 동지들'을 소개한다. 그야말로 교토사양구팽(狡兎死良狗烹), 즉 교활한 토끼가 죽으니 충성스런 사냥개를 삶는다는 표현이 적절한 듯하다. 국민당군과의 내전이 끝나자, 모택동은 권력을 공고화하기 위해, 또는 권력을 되찾기 위해, '대장정'에도 함께했던 2명의 야전 사령관과 1명의 부주석을 숙청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숙청됐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팽덕회(彭德懷)
팽덕회는 고아로 자란 농민의 아들로, 공산 혁명 전선에 뛰어들어 항일전쟁과 소위 대장정을 모택동과 함께 했고, 6.25 전쟁에서 중공군 총사령관(총사령원)을 맡았던 인물이다.
팽덕회는 소위 대장정 시절, 모택동을 한밤중에 찾아가 긴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하지만 1959년 대약진 운동을 하지 말자는 건의를 했다가 모택동의 눈 밖에 났다. 대약진 운동은 1958~1962년까지 벌어졌고, 이 운동의 실패로 굶어죽은 사람들이 중국 정부 발표로만 2천만 명이 넘는다. 서양에서는 3~5천만 명까지도 보고 있다. 모택동은 자신의 정책이 실패로 돌아가자 일단 사임했지만, 나중에 돌아왔을 때 팽덕회를 숙청한 것이다.
모택동 측은 팽덕회를 숙청할 때, 1940년 팽덕회가 국민당군에 배속되어 일본군과 백단대전(百團大戰)을 시작할 때, 작전을 미리 알리지 않고 독단적으로 진행했다는 점 등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의 죄과로 들었다. 당시 모택동은 일본군과 크게 싸우지 말고 '작은 작전(마작전/麻雀戰)'만 하라는 지시를 내렸지만 팽덕회는 이를 듣지 않고 일본군과 싸웠던 것이었다.
※ 사실 모택동은 일본군과 내통하고 있었는데, 팽덕회가 방해가 됐던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모택동은 일본군과의 교신을 담당했던 첩자 반한년(潘汉年/판한녠)을 증거인멸 차원에서 감옥에 가두었다.

1967년 나이 70이 다된 팽덕회는 홍위병들로부터 주먹과 발로 구타를 당했다.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였고 땅바닥에 일곱번이나 굴렀다고 한다. 또한 홍위병들은 팽덕회의 머리를 눌러 강제로 숙이도록 하는 등 수모를 주었다. 의사들로부터 그가 흉부에 통증을 느끼고 호흡이 곤란하다는 보고가 올라왔지만, 그 다음 날에도 또다시 끌려나가 얻어맞았다. 이같은 수모가 계속되다가 감옥에 수감되었고, 1973년에 직장암 진단을 받았다. 1974년 그는 병원에서 쓸쓸히 숨졌으며 화장되었다.
(1) 삼반이란 반(反)모택동, 반 공산당(反黨), 반(反)사회주의를 뜻한다.
유소기( 劉少奇 / 류 샤오치)
유소기는 모택동이 물러나 있을 때, 국가 주석의 역할을 대신 했던 사람이다. 돌아온 모택동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1966년 유소기 등을 비난하는 대자보가 붙기 시작했고, 그는 결국 북경을 떠나 소도시에 가택 연금되었다. 그의 처 왕광메이는 1967년, 딸이 교통사고를 당했다는 괴 전화에 속아 병원으로 갔다가 기다리고 있던 홍위병들에 의해 감금되었다. 모택동은 옛 정이 있었는지 유소기의 집을 찾아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 자리에서 그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당신 딸의 다리는 좀 어떤가?' (2)

그 후 유소기 또한 홍위병들에게 끌려갔다. 그는 구타를 당하면서 국공내전에서 입은 팔의 상처가 재발했고, 치아가 거의 빠져 음식을 씹을 수도 없었다. 홍위병들은 당뇨병인 그에게 당뇨약을 주지 않고 2-3시간만 재우는 고통을 주었으며, 의사는 얻어맞은 그를 진찰하면서도 청진기로 때렸다. 간호사의 진료 기록에는 유소기의 몸에 온전한 혈관이 거의 없다고 적혀 있을 정도였다. 결국 그는 말년에 병원에서 죽었고, 이름을 유위황으로 바꾸어 노숙자가 죽은 것처럼 처리하였다. 모택동은 그의 부고를 알리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1980년에야, 등소평은 유소기를 복권시켰다.
참고자료
(2) "平平的腿好了没有?" - 딸 류 아이친의 회고록(2010) , 부인 왕광메이의 회고록 (王光美回憶錄)
임표(林彪)
임표는 국공 내전에서 공산당군을 지휘해 국민당군을 몰아낸 야전군 사령관이었다. 팽덕회와 함께 홍군(중공군) 최고의 야전 사령관으로 꼽혔다고 한다. 그는 모택동의 뜻에 따라 유소기 등의 숙청 작업에도 관여했었다.

그러나 그러한 그도 모택동에 의해 살해되었다. 중국 정부의 공식 발표로는 그는 반란을 꾀하다가 비행기를 타고 탈출했다고 한다. 비행기는 몽골 상공까지 갔지만 연료 부족으로 추락해 아들과 함께 숨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회의론도 존재한다. 회의론자들은 임표가 도망친다면 소련이 아니라 대만이나 미국으로 도망치는 것이 현실적이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